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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야구 야구의 신 김성근 감독의 일화들

by 별나군 2024. 1.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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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근 감독은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감독 중 한 명으로 손꼽힙니다. 그는 감독으로 재임한 16년 동안 9차례 한국시리즈 진출, 7차례 우승을 차지하며 화려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런 김성근 감독에게는 정말 다양하고 많은 일화들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인상적인 일화들을 몇 가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김성근 감독

 

 

 

 

목차

     

     

     

    야신 김성근 감독 일화

     

    충암고 시절

    충암고 감독할 때 타자 게이지에서 스윙 교정하다가 얼빠진 타자넘이 풍기질한게 팔로우 스윙으로 야신 입을 강타하게 되면서 김성근 감독의 이가 몇 개 그냥 굴러떨어지고 피가 줄줄 흐르는 상황에서도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네 스윙 범위 안에 들어간 내 잘못이다"라고 토닥거리셨다고......

    당시 충암고는 신일고에 밀려서 분위기 안 좋을 때라서 이런 사고가 있었음에도 덮고 넘어갔다고 합니다.

     

     

    김성근 감독과 김기태 감독

     

    김성근 감독과 김기태 감독

    쌍방울 어려웠던 시절 그때 김기태가 주장으로 함께 했었는데 그때 쌍방울이 나름 잘 나갔을 때라서 여기저기서 후원금이 많이 들어왔었는데 보통 그런 후원금은 1군 선수단이 나눠서 쓴다던가 나름의 룰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김성근 감독님이 김기태한테 '다 같이 고생하는데 2군 선수들이랑 다 같이 나누는 게 어떻겠냐?' 그래서 그때 김기태 감독이 두말하지 않고 2군 선수들과 다 같이 나눠서 썼다고 합니다.
    김기태가 삼성에서 다시 SK로 왔을 때 저 얘기를 하면서 그 시절 쌍방울 소속이었을 때 생각이 참 많이 나더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SK에서도 감독님께서는 청소 아줌마부터 버스기사 아저씨까지 다 챙기셨다고 합니다.

     

    김성근 감독과 이상훈

    어느 날 이상훈에게 전화가 왔어요. “감독님, 보고 싶습니다. 목소리만 들어도 좋습니다” 이러더군요.
    남자끼리의 믿음이랄까. LG 감독으로 왔을 때 상훈이한테 그랬어요. “머리 잘라라.” 그랬더니 상훈이가 “감독님 머리만은 딱 한 번 봐주십시오.” 그러더라고요.
    그래 제가 “널 예외로 봐주면 앞으로 밑에 있는 아이들에겐 뭐라고 하냐.” 그랬더니 상훈이가 “감독님 죄송합니다. 그래도 이것만은 부탁드립니다” 하더군요.
    그래 제가 “알았다. 너 뿐만 아니라 어느 선수도 머리를 자르게 하지 않겠다”라고 말했어요.

    그게 믿음이에요. 전 상훈이를 믿었고 상훈이의 머리를 본 게 아니라 마음을 봤어요.

    상훈이가 그날 이후로 엄청나게 잘 던졌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 게 남자들의 믿음이 아닐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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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근 감독 회갑연

    2002년 당시 엘지가 준우승을 하고도 당시 엘지 사장 어윤태 씨에 의해 강제 해임되었는데 해임 직후 김성근 감독 가족들이 초대장도 안 돌린 상태에서 조촐한 회갑연을 열었는데 양준혁을 비롯한 100여 명이 넘는 제자들이 회갑 연장에 몰려들어 회갑 연장도 어쩔 수없이 더 큰 장소로 바꾸게 한 드라마틱한 상황에서 심지어 엘지 프런트 직원들도 참석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오늘 여러분을 다시 보니 38년 전 대한민국에 영주 귀국한 것은 생애 최고의 결심이었다는 자부심이 든다.

    감독이기에 앞서 아버지의 입장에서 여러분과 가족의 미래를 책임지려고 했다."

    그리고 김성근 감독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고 합니다.

     

    김성근 감독의 인생철학

    가끔 보면 김성근이가 어떻다고 뭐라 뭐라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내 인생과 야구 철학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대개 그런 말을 한다.
    나는 지금까지 주위 사람들이나 구단의 높은 분들과 애써 술이나 밥을 먹으러 다니지 않았다.
    그 시간에 연습도 해야 하고 공부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갖고 있는 인생철학 가운데 하나가 일일이 해명하지 않는 것이다!

     

    선수들이 말하는 김성근 감독

    • 최창호 - 내 야구 인생에서 가장 존경하는 스승님은 바로 김성근 감독님이다.
    • 가득염 - 김성근 감독님과의 만남은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었다. 
    • 이승엽 - 힘들 땐 김성근 감독님이 내 마음을 헤아려주신다는 믿음이 내겐 있었다. 
    • 심성보 - 아버지 같은 김성근 감독님입니다. 
    • 박철순 - 그분은 프로생활뿐 아니라 내 선수 생활 통틀어 만난 유일하게 존경하는 선생님이시다. 
    • 김재현 - 김성근 감독님을 만난 이후에 야구에 새롭게 눈을 떴습니다. 
    • 박찬호 -그동안 김성근 감독님께서 쏟으셨던 야구에 대한 열정과 고뇌, 그리고 인내에서 야구의 진실과 깊은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 양준혁 - 김성근 감독님께 야구의 혼을 배웠다 

     

    제 2회 WBC감독 국대 감독 문제

    당시 국가대표팀 감독 문제에 있어서도 실질적으로 1순위 김경문 감독. 2순위 김인식 감독이었습니다.

    김경문 감독 고사후 김인식 감독 내정해 놓고는 몇 시간 전에 윤동균 기술위 1명 보내서 김성근 감독과 30분 커피숍 면담 후 단 한1번의 고사 의견 수렴.

    그 내용을 언론에 대서특필하여 김성근 감독을 야구팬들의 집중포화를 맞게 합니다.
    실질적으로 김성근 감독은 국가대표 감독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몇 시간 후 김인식 감독이 계신 곳으로 이미 하일성 총장과 김인식 감독과 절친한 아마 야구 관계자 윤동균 기술위 모여서 무릎 꿇고 폭탄주 마시면서 부탁했다고 토크쇼에서 故 하일성 위원이 얘기했습니다.

    KBO가 당시 마치 거절하길 바란 듯이 '형식만 취한 ' 이유는 여론으로부터 '왜 KBO는 2년 우승 팀 감독인 김성근을 추대하지 않는가? ' 라는비난으로부터 벗어날 명분이 필요했기 때문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야구 팬들의 모든 욕은 김성근 감독이 한몸에 받아내게끔 눈부신 언론 플레이로 성공시키면서 지금까지도 김성근 = 쪽바리 = 매국노 공식을 완성시켰습니다.

    하지만 대중들이 최근 최강야구를 통해 보여주는 김성근 감독님의 야구와 선수를 대하는 태도나 모습을 보면 김성근 감독님의 선입견이 많이 사라진 모습입니다.

    이미지, 여론, 대세. 언론플레이 이런 것들이 항상 진실의 충분조건은 아닌 것 같습니다.

     

     

    김성근 감독과 아들 김정준

    그날은 아버지가 야구 감독을 하면서 처음 눈물을 흘린 날이다.
    아버지는 흙과 땀, 그리고 눈물이 범벅된 유니폼을 입고 스파이크까지 신은 채로 동대문운동장에서 집까지 걸어왔다.
    마지막 남은 온 힘을 다해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그대로 픽 쓰러졌다.
    그대로 좌절하여 쓰러진 아버지 곁으로 7살 난 아들이 다가왔다.
    아들은 1시간이 넘도록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누워있는 아버지를 말없이 서서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1977년 고교 야구 4강권은 수성해야 대학 진학이 수월했던 그 당시 김성근 감독이 회상한 어느 날이다.

     

    그가 이끌던 충암고는 황금사자기 8강전에서 9회 말 1사까지 2-0으로 앞서다가 역전 끝내기 3점 홈런을 얻어맞고 패배했다. 기세봉이 노히트노런 피칭을 하고 있던 터였다.

    선수들은 대성통곡을 했고, 제자들의 울음소리가 메아리 치자 독하디 독한 김성근 감독도 말없이 눈물을 쏟았다.

     

    아들, 아버지를 일으키다

     

    그로부터 30년이 흘러 2007년 가을. 페넌트레이스 1위를 차지한 SK는 두산 베어스와의 한국시리즈에서 1·2차전을 모두 내줬다.

    과거 24차례 한국시리즈를 보면 초반 2연패를 당하고 역전 우승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던 터였다.

    김성근 감독은 승부처였던 2차전에서 패배한 뒤 송태일 매니저에게 "이대로 4연패로 진다면 감독을 그만두겠다"라며 그답지 않게 약한 소리도 했다.

    패배의 그림자가 너무도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김성근 감독은 새벽 2시가 되도록 문학구장을 떠나지 못했다.

    반격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고 용기도 나지 않았다.
    다리가 풀려 감독실 소파에 드러누웠다.
    이때도 유니폼을 입은 채였다.

    똑똑. 문이 열렸다.

    김정준 SK 전력분석팀장, 김성근 감독의 아들이었다.

    아들은 마치 30년 전 그날처럼 아버지 곁을 말없이 지키고 있었다.

    한참 후 정적이 깨졌다.

    "가라."

    "네, 저 갑니다."

    "야속한 놈."

    겨우 몸을 일으킨 아버지는 인천 송도 집으로 돌아왔다.
    아들로부터 문자메시지가 와 있었다.

    '장수가 약해지면 병사들은 쓰러집니다. 힘내세요.'

    김 감독은 "아들 뒷모습을 보니 까맣게 잊고 있었던 30년 전 기억이 되살아 나더라.

    그때처럼 난 해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갑자기 마음이 편해졌다"라고 회고했다.

    77년 충암고는 다음 대회인 봉황대기에서 기어코 우승을 차지했고 SK는 2007년 한국시리즈에서 1,2차전 패배 후 3~6차전 4연승을 쓸어담으며 창단 후 처음으로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아들, 아버지를 뒤따르다

    아버지는 야구가 전부다.

    그래서 아들에게도 야구를 시켰다.

    60년대를 호령했던 좌완 투수의 아들은 오른손잡이 내야수였다.

    아들은 아버지가 한이 서려 있는 충암고를 거쳐 연세대에 진학했고 92년 2차 9순위 지명 선수로 LG에 입단했다.

    아들은 그해 1군에서 5경기만 뛰고 은퇴했다.
    14타수 2안타(타율 0.143)가 프로야구선수 김정준이 프로에 남긴 기록의 전부다.

    다들 "아버지의 그림자가 너무 크다. 아들이 아버지를 넘기기란 역시 힘들다"라고 수군거렸다.

    그러나 아들의 야구 인생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그는 93년부터 LG의 전력분석팀에서 일했다.

    당시만 해도 전력분석이라는 개념 자체가 낯설었다.

    LG는 자체 개발한 프로그램을 통해 상대 전력을 데이터화해서 분석하는 시스템을 활용했다.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야구를 보는 눈과 이를 분석하는 유전자를 물려받았다.

    동작을 보는 눈썰미, 적재적소에 필요한 데이터를 갖춰 놓은 그는 일본 주니치 드래곤즈로 연수를 다녀온 뒤로 한국 야구 전력분석의 일인자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아들 김정준이 '김성근의 아들'이라는 굴레를 벗고 전력분석가 김정준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시점이 이때다.

    아들이 LG 직원으로 일할 때 아버지는 삼성·쌍방울 감독이었다.

    상대 감독과 분석원의 신분으로 서로의 약점을 봐야 했던 처지였다.

    김 감독이 2001년 LG 지휘봉을 잡자 자연스럽게 부자상봉이 이뤄졌다.

    하위권을 전전하던 LG는 2002년 한국시리즈에 올랐다.

    앞에서 아버지가 끌고, 뒤에서 아들이 밀었다.

     

    아버지, 아들에게 배우다

    LG는 전력 열세를 딛고 한국시리즈에서 삼성 라이온즈와 치열하게 싸웠다.

    승부 흐름이 LG로 넘어가는 순간, 6차전 9회 말에 삼성 이승엽의 동점 3점 홈런, 마해영의 역전 결승 홈런이 터졌다.

    김 감독이 77년 황금사자기 이후 가장 아쉬워했던 준우승이었다.

    시리즈가 끝나자 LG는 김 감독을 해임했다.
    성적 부진이 아닌 구단과의 마찰 때문이다.

    김 감독은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는데 감독을 내치는 것은 야구인에 대한 모독"이라며 이를 갈았고, 아들도 곧 보따리를 싸고 SK로 떠났다.

    아버지와 아들은 5년 뒤 재회했다. 부자는 이미 서로의 분야에서 정상에 서 있었다.

    '야구의 신'으로까지 칭송받는 김 감독은 야구 얘기를 하면 누구에게도 물러서지 않는다.

    아버지에게 유일하게 쓴소리를 하는 이가 아들이다.

    김성근 감독은 전력분석가인 아들에게서 조언을 받았다.

    수도 없이 '이럴 땐 이렇게 하면 좋지 않겠어요?'라는 문자메시지가 날아들었다.

    예전 같으면 콧방귀를 뀌고 말았을 테지만 이젠 아버지도 아들도 많이 변했다.

    김정준 팀장은 한국시리즈에서 두 경기를 내주고 무너져있던 김성근 감독을 일으켰다.

    마흔이 다 된 아들은 이튿날 머리카락을 빡빡 밀어버렸다.

    역전 우승을 차지하고 처음으로 아버지와 얼싸안은 아들의 입술은 심하게 부르터 있었다.

     

    김 감독이 말했다.

     

    "내가 정준이 나이 때 야구가 안돼서 삭발한 적이 있어. 그때 생각이 나더군. 아들은, 아버지를 그렇게 닮아가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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